차이나는 클라스- 추사 김정희의 속죄로드

   
차이나는 클라스- 추사 김정희, 세한도 
현판 떼고 했던 그 독기들이 좀 빠졌나요?
조선시대 까도남 추사의 독설


두번째 피해자는 백파 선사


세번째 피해자는 원교 이광사


래퍼 저리갈 디스의 명수 추사는 과연 달라졌을까?

이제는 세한도처럼 맑은 마음




소울메이트 초의가 있는 대흥사


원교 이광사의 현판을 다시 본 추사는



두번째 피해자인 백파 선사


그런데 눈이 많이 와서 제시간에 못갓어요


백파 스님 입장에선 두번 당한거예요.


이쯤되면 그야말로 운명의 장난임 결국 백파가 지내는 절을 향해 큰절을 올리고 떠난 추사





사죄의 뜻으로 창암 이삼만의 묘문을 남긴 추사


속죄로드를 지나 도착한 서울

귀양 후 몰수된 추사의 서울집


강상= 한강의 상류임

집안의 먼 친척과 친구들의 도움 속에 가난하게 살았던 추사의 강상시절

이때 쓴 편지들을 보면 전부 도움을 준 이들에 대한 감사 편지임

정사를 떠나 학문과 예술에 더욱 집중했던 추사




다산 정약용의 제자가 당호를 써달라고 부탁함

정약용을 보배롭게 여기는 산방


그 사람 뒷동산이 조그맣대


디자인적으로도 최고임


윗줄은 맞추고 아랫줄은 축축 늘어진 것이







작은 창으로 밝은 빛이 들어오니
나로 하여금 오래 머무르게 한다.

글씨가 그림처럼 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아기가 그린 것 같은 자유분망함

그런데 나름의 규칙이 있음


모던한 느낌이라고 장난기가 있어서 좋음

글씨를 갖고 노는 경지에 이름

같은 글씨체도 사람에 따라서 달라지는데




윤순의 글씨는 아주 유려해요


옛날 사람들이 과장이 심해요


추사와 완당 김정희하면 떠오르는 호

생전썼던 호만 무려 100개 이상임


최초의 호가 추사임



다양한 호를 통해 자신을 표현한 추사








당호가 72마리의 갈매기가 날아드는 초당

추사의 또 다른 호는 수졸산방


기교를 걷어내고 서툰 듯 졸함이 느껴지는 서체임

세한도 외 산수화는 몇 점 그리지 않은 추사


난초는 늘어지는 맛으로 그리는 것




추사의 난초는 난초 그림이 까슬까슬하고 돌에 새긴 것 같은
글시 맛이 어울릴 적에 멋있어요


추사가 찍은 도장도 있고


우리나라 그림에는 저렇게 도장찍힌게 많지 않아요

감상인은 멋이면서 진품인증의 의미가 되기도함


감상인의 예
구룡산인 진장:  구룡산인이 보배롭게 간직했다


내눈을 거쳐 간 것은 내것!

홍선대원군의 난 스승이 추사선생인데





생명이 느껴지는 난 매력적이죠


그런데 왜 추사의 난이 더 주목받는지?

서로다른 흥선대원군은 멋을 추사는 자연스러움을 강조




박규수 선생이 그랬죠

추사의  글씨는 어렸을때부터 늙을때까지 여러번 변했다.

사람들은 천재라고 이야기하겠지만 추사는 그렇게 말 안햇을 거예요




아무리 9999분을 얻어도 나머지 1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천재성의 결과라면 처음부터 포기할 텐데

추사가 우리에게 주는 희망과 자극의 메시지


추사 사단에 붓 장인 박혜백과 전각가 오소선
표구 전문가 명운 


요즘 현대미술과도 비슷한 시스템임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던 추사

장인들도 키우고 자신의 작품세계도 끌어올린 추사


학문과 예술의 일치로 문자향 서권기




학문을 닦고 수양한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분위기

즉 학예의 일치가 미학의 완성임 스킬이 다가 아님

예술이든 학문이든 결국 자기를 찾아가는 여정이구나...

그랬는데 헌종 사후 강화도령에서 왕이 되었던 철종

왕실 제사 문제로 논의 하던 중 논쟁을 거듭하던 끝에 여론의 뭇매를 맞고 유배를 가게된 추사의 벗 권돈인


또다시 북청으로 유배 가게된 추사

조선의 끝에서 다시 끝으로 유배당함




조용히 살고 있는데 왜?? 이 시련으로 무르 익어감


다시 2년동안 귀양살이를 하게되는데 제주도 유배로 모자라
북청 귀양살이까지 하는 추사


어린 김정희를 만난 채제공이




학문만으로도 천하에 이름을 날릴 것

예술가는 기본적으로 감성을 극도로 발하는 직업이에요

다른사람보다 앞서 표현할 경우가 많은데 학문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아요

학문적 분석이 우선이고 감성은 그 후의 문제임

자신을 계속해서 조심하고 분석하고 종합을 하거든요 채제공은 추사가 예술로서 대성할때
시련이 있을 거라고 예언을 한거예요




2년 유배후 과천으로 집을 옮긴 추사


이집을보면 너무 속상하다고..ㅠ
원래는 초가집인데 기와집으로 잘못 복원함


참외밭의 초당이란 뜻의 과지초당


이렇게 아무것도 없이 썰렁한 것보다 뭐라도 있는것이 더 나은것 같기도한데..
좀더 본래 분위기를 살려 복원했더라면.. 어땠을까...

과천시절 더욱 무르이어간 추사의 작품세계




추사의 명작은 이때 쏟아져 나왔어요





제주도 유배를 다녀온 뒤에 글씨는 장난기도 있고 아이같은 느낌이 보였는데
점점 장난기가 없어진거 보니까 또한번 북청 유배의 고생이 느껴지는 것 같다고

노년의 허허로움과 초연함이 느껴지는 글씨들...

과천시절 가슴 저미게 하는 노년의 추사가 쓴 글이 있는데




쓸쓸한 노년의 삶 속에서 인생을 관조하게 된 추사


최고의 요리는 두부와 오이, 야채를 넣고 풀 끓인 것이고
최고의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손자와 함께하는 모임이다.

소박한 삶을  찬미한 노년의 추사가  쓴 글씨

최근 보물로 지정 예고된 작품이라고하네요.


불계공졸, 어떤 경지일까?

도의 경지에 오른 추사 거침없이 디스하던 시절은 없음

이때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위대해지지 않았고




경판 보관을 위한 경판고를 만들면서 현판을 부탁함


71살 먹은 과천사람이 병중에 썼다.

판전을 쓰고 3일 만에 세상을 떠난 추사 진짜 마지막 제품임


8살때 썼던 편지글과 비슷함

8살때 글씨는 미숙하지만 이때는 단련된 미숙

자신의 테크닉을 최대한 억제하고 아무 욕심 없이 허허로운 마음으로 쓰니까

죽음을 앞두고 어린아이로 돌아간 글씨


추사 생의 마지막 불꽃 같은 작품 판전

명문가의 오만한 천재가 인생의 황금기를 지나

모진 고난과 역경을 작품으로 승화시킨 추사의 삶


18세기 겸재 정산 단원 김홍도 그 아름다운 준봉들을 경험하다가
그때까진 거기가 정상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거기서 딱 보니 멀리 추사가 보이는 거예요

러시아 문학계의 말을 빌리자면 러시아 문학계의 정상 톨스토이에 올라서면

저 멀리 안개 속에 도스토예프스키가 보일 것이다.


우리가 훈련해서 가면 다 그가치를 알 수 있어요
추사는 저 멀리 아득한 절벽의 안개 속에서 있어서


철종실록 졸기에도 기록된 추사의 죽음




때로는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잘해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비판할 수 없었으며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며 세상의 쓰임을 당하고 버림을 받으며
벼슬에서 나아가기도 하고 물러나기도 했으니 세상에선 그를 송나라
소동파에 비교하디고 하였다- 철종실록


그중에서도 특별한 사람은 졸기라고 짧은 글이 들어가요

당대 추사의 위치를 보여주는 기록


사람들에게 천한 중이라고 멸시받으니까 안 갔어요
추사 사망 2년째  되던 때 찾아온 초의






그러나 달이 밝으면 구름이 끼고 꽃이 고우면 비가 내립니다.

슬프다 선생이시여
40년 깊은 우정 잊지 말고 저세상에서는 오랫동안 인연을 맺읍시다.
-초의의 추사제 문


그리고 추사의 무덤을 지키는 한 그루의 소나무

지금은 두개의 기둥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과거엔 온전히 풍성했던 소나무 폭설때문에 부러져버린!




추사 김정희를 본래 저렇게 아름드리 소나무인데 초라해진 나무 정도만 말한것같다고
누군가가 추사를 더욱 깊이 연구해서 아직 못다 밝힌 그의 학문과 예술세계를 분석해

단순히 조선의 서예가가 아닌 200년 전 세계 무대에서 활약한

위대한 인물임을 다 같이 기억해줬으면 하는 바람


중국 포함 동양 전체 서예사의 5대 인물들


그리고 마지막 청나라 시대는 추사 김정희!

외국 서예가들도 인정했던 추사 김정희


살아가는 것 자체가 가치 있는 일이라 느낀 시간임


<출처: jtbc  차이나는 클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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