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여의 제주 유배 생활로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된 추사
추사에게는 영광의 북경보다 아픔의 제주도로 간 것이 그를 위해서 그의 예술을 위해서
추사를 비롯한 우리 모두에게 복일지도...
한순가의 추락으로 유배지에 갇힌 추사
가시나무 울타리에 갇힌 답답함
먹지못하는 어려움과 혼자라는 외로움!
아내에게 음식 보내달라는 편지를 많이 쓴 추사 대개 김치 얘기인데
김치는 제대로 된 그릇에 담아야지
누구나 새로 간 지방의 풍토와 물이 안 맞으면 고생하는데 유배지에 병원이 있어 약국이 있어
아마도 지금의 백내장같은 질병이었던거 같다고
유독 아팠던 날 추사가 쓴 편지를 보면
남을 곧잘 지적했던 젊은 날의 추사
당대고승인 백파 스님이 펴낸 책 선문수경을 보고
그걸 또 넘기질 못하고 그에 반박하기 위해 추사가 쓴 백파망증 15조
백파가 망령되게 증명한 15가지
특히 자료으 ㅣ근거 부족을 크게 지적햇는데
신랄한 표현도 아끼지 않았던
15개의 조항을 들어 백파를 비판함
사람 잘 안 바뀐다고....ㅋㅋ
백파가 다시 반론으로 오가는 논쟁 그에 대한 분석은 후손들의 몫임
여러 사람들이 백파망증 15조를 연구했는데
망증 15조 논쟁은 무승부!!
결국 백파, 추사 모두 선을 얘기했다는 것
선학들이 이야기하는 걸 보면
여전히 까칠한 추사의 성격은 언제 바뀜?
임종도 못 보고 아내를 떠나보낸 추사
아내의 죽음으로 견디기 힘들었던 아픔을 담은 시
이 글보다 더 처절한게
안타깝게도 그때 이미 아내는 세상을 떠난 후였음
빠른 서신 교환이 힘들었던 당시
제주에서 서울까지는 무려 월 단위로 편지가 전달되고 아내에게 한글 편지를 자주 썼던 추사
그래서 장차 품으면 무지개가 되고 맺히면 우박이 되어 족히 공자의 마음이라도
흔들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주에서 가르쳤던 제자가 30여명인데 대정향교
대정향교 기숙사에 써붙인 의문당
오현단은 조선 시대 제주 발전에 공헌한 다섯 사람을 모신곳이라고하네요.
그 누구보다 추사 선생이 제주도의 인재를 많이 가르쳤어요
제주로서는 축복이었죠.
그렇게 제주 유배 생활이 익숙해질 무렵
저 그림의 원류는 소동파!
소동파는 거듭된 좌천과 긴 유배로 험난한 삶을 살았던 북송의 시인이자 문장가임
소동파에 스승님을 대입한 그림
유홍준이 직접그린거라고하네요. 질문왕에게 선물로 줄거라고!
추사를 위로하러 온 의리남
말을 잘못 타가지고 나 허벅지 살이 벗겨졌다니까
초의 놀리는 재미가 꿀잼임
초의는 추사한테 그런적이 없다고해요
무려 110권의 책을 요청함 동생들은 힘들었을거라고
이상적이라고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역관인데
책덕후인 추사에게 한 줄기 빛인 이상적에게 고마움을 글로 대신하던 중
국보 180호 세한도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걸 안다더니
그대의 우정이 귀양살이 전이나 후나 덜한 것이 없네
쓸쓸한 노인 완당이 쓰다...
저 간결함 속에 학예일치 학문과 예술이 있고
서양화의 관점에서 보면 0점인 그림임.
하지만 못 그려서 간략하게 그린것인지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것인지
그림의 가치는 그 차이에 따른 것
청나라 학자들의 연회에서 세한도를 공개함
세한도의 길이는 약 14m 라고해요
보는 사람마다 받는 느낌이 다르다고
이상적에게 선물한 세한도
국제적 학예교류를 위해서 그러니까 재러 간거라고 자랑하려고..ㅋㅋ
세한도는 죽고나서 아들에게 줬고 이후 세한도의 행방은?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당시 명성황후 민씨 집안이 대단했어요
명성황후의 민씨집안에서 소장하고 있다가
이후 경매시장에 나온 세한도
여기서 후지즈카 치카시가 세한도를 구입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던 당시 미군의 폭격에 세한도를 잃을까 걱정해
1944년 후지즈카의 도쿄 집을 찾아간 손재형
물러나지 않고 계속해서 후지즈카를 찾아간 손재형
결국 아들 아키나오를 부른 후지즈카는
그리고 가라고 했어요 하지만 가지 않자..
덕후 마음은 덕후가 안다고
손재형의 진심을 깨달은 후지즈카
평생 이분을 존경하며 살았기 때문에 값을 받고 팔고 싶지 않습니다.
힘들게 가져왔는데 소전 손재형 선생이 국회의원 나왔다가 정치자금이 모자라서
담보로 맡겼다가 갚지 못해가지고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 보관중임
문화유산의 경우 이동의 역사도 하나의 역사임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추사의 위대함 그러니까 한국을 싫어했을리가 없죠
그런데 후지즈카 교수에게 세한도를 받아온 직후에
안타깝게도 연구실에 있던 작품은 모두 소실됨 그리고 집에 남은 작품들은
2008년에 과천 박물관에 기증함
추사의 열렬한 팬인 후지즈카 치카시
그렇게 글씨 써달라는 부탁이 많이 왓어요
유재의 뜻은? 기교를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고
재물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백성에게 돌아가게 하고
내 복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자손에게 돌아가게 한다.
유배 생활로 추사의 삶도 달라지지만 글씨도 달라지는데
동주 이용희에게 직접 물어봤다고
왜 추사체를 제주도 귀양 시절에 생겼다고 하죠? 귀양 안 갔어도 생기지 않았을까요?
귀양살이에서 쓰는 글씨는 남에게 보여준다는 생각없이 쓰는 거니까 마음대로 쓸수 있었다는 거죠
긴 유배 생활이 빚어낸 새로운 경지!
유배전과후 추사체의 차이는?
기름기가 빠지고 담백해짐
추사체 성립에 대한 박규수의 고찰
박규수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조선 후기 문신임
추사의 글씨는 어렸을 때부터 늙을때까지 여러 차례 바뀌었다
신이 오는 듯 기가 오는 듯 바다으 ㅣ조수가 밀려오는 듯하였다.
그래서 내가 함부로 추사체를 흉내내지 말라고 한 것이다.
1974년 3월부터 1975년 2월까지 교도소 생활을 했다고함
민청학련 사건은 공산정권 수립을 추진했다는 혐의로 해당 관련자들을 구속한 사건임
군부독재 하에 힘들게 감옥살이를 한 유쌤.
보통 책은 안 넣어주고 성경을 넣어준다고 그것도 재미없는 신약성경만
그래서 교도관에게 따로 요청함
불경을 넣어주면 화엄경이나 금강경같은 책을 넣어줄줄 알았더니
신묘장구 대다라니를 넣어줌.
스님들도 못 외우는 분이 많은 염불을 줌
규정이 좀 느슨해져 한국회화사 책을 읽고 있던 유쌤
자기가 들어가고 싶은 집은 다 들어가는 404번
집마다 그림이 다 있는데 모른다고 뜻밖의 동업을 제안함
연말에 새로바뀐 나팔수가 취침 나팔을 부는데
앙코르곡을 요청하자 고향의 봄을 연주해줌
앞으로 계속 교도소에 있으면 한국미술사를 연구하겠다
드디어 약 9년간의 귀양살이를 마친 추사
그러나 추사의 발길을 붙잡는 풍랑주의보
그래서 해신당에다 제문을 올리는 거야
추사 선생의 문집에 나오는 글 중에서 사람에 따라 평가가 갈리는 추사의 제문내용
왜냐면 처음부터 끝까지
이말밖에 없다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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