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는 클라스- 유홍준, 200년전 한류스타 추사 김정희



다음 인물의 공통점은?
 

김연아밖에 모루겠음...ㅎㅎ 세분다 한류스타라고하네요.

요즘의 한류 스타가 아닌 200년 전의 한류스타로 국내뿐 아니라 국제적인 무대에서
우리문화를 키운 인물을 떠올렸을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분

오늘날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속 인물임



추사 김정희





호가 많음. 완당이라는 호도 가지고 있음 금석학의 대가
세한도를 본떠서 지은 제주 추사관


세상에는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

시와 문장의 대가, 추사, 서체에 가려진 그의 진면목


중국문화권의 칭송을 받고 또 겸손하게 배운 것을 우리에게까지 이식한
한국문화사 최고의 위인인 추사는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고해요

정점에서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인생은 더 깊어지고 예술은 더 높은 경지로





전부다 추사체임.
한 사람의 글씨라기엔 제각각인 스타일임



여러분이 쓴건 지저분하지만 추사체는 멋있다고




원래 글씨의 묘를 깨달은 서예가는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도 법도에 구숙받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당시 낮게 평가되곤했던 추사체

지인들에게 쓴 편지 속에 추사의 마음고생이 드러나기도함


괴하지 않으면 글씨가 되지 않는 걸 어떡하나요 . 외면 당하던 천재의 외침

개성을 드러낸 사람의 특징 중 하나는 아카데미즘에 대한 도전이에요
기존 가치 질서에 도전하는 태도

새로운 스타일은 누군가에겐 괴상해보이기 마련



어렸을땐 정석으로 그리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짙어지는 개성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스페인 세계적인 건축물에도 개성을 볼 수 있음





직접보니 사람이 만든게 아닌거 같다고

피카소와 가우디를 이해했다면 추사체의 자유분방함과 울림도 이해할 수 있어요

추사의 삶을 통해 봐야할 학문과 예술의 세계

추사에게서 배우는 예술 그리고 인생



청나라 시대 학문의 1인자는 김정희




추사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이곳
영조대왕의 사위였던 추사의 증조부


본래 53칸으로 현재는 20여 칸만 남아있는 추사고택


추사가 임신 24개월 만에 태어났다?
대동ㅇ기문 추사의 탄생에 얽힌 또 다른 기록을 보면


그만큼 추사의 특별함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을 것
경주 김씨 4형제 중 막내 김노경의 첫째로 태어난 추사


동생들의 아들 중 추사를  데려간 백부
일곱살 무렵 큰집의 양자로 입적했는데


큰집의 장손으로 어린 시절을 보낸 추사


지나가다가 우연히 추사의 글씨를 보게된 박제가


박제가를 스승으로 모시게된 추사

정조때 영의정을 지낸 번암 채제공



영의정 채제공도 알아본 추사의 천재성


엎드려 살피지 못하는 가운데 더위가 심합니다. 몸 건강하신지요?


8살에 아버지한테 쓴 편지라고해요

편지가 보존될수 있었던 이유는 편지여백에 답장을 썼던 친부



자식이 아버지 글씨를 배우지..




비슷한 시기 한글 편지도 곧잘 썼던 정조대왕




 당시 한글을 경시하고 삼갔던 선비들 반면 추사는 한글 편지를 통해 아내와 며느리를 배려함 세간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았던 추사


그렇게 청나라 학예의 기초를 닦던 중 드디어 연경에 가게된 추사


당시 청나라의 수도이자 세계 무역의 중심이었던 연경


무려 약 400명의 학자가 10년간 정리했는데 창고 네곳에서 보관중인 사고전서
수천년 중국 문화 역사에 있어 



세계적으로도 최고의 문화 강대국이었던 청나라
반면 청나라 문물을 배척했던 조선




이들을 알아야 추사를 이해할수 있음
선배들이 했던걸 모아서 완성한거거든요


연암 박지원도 동지사로 연경에 갔잖아요

동지사란? 동지를 전후로 청을 방문한 사신임


1년의 시작은 동짓날
당시 호조참판이었던 추사의 아버지 

자제군관제도라고해서 외국에 보내는 사신의 자제로 임명한 군관을 말해요
조선이 아닌 다른 세상을 경험할 기회를 제공함


추사의 스승인 박제가의 연경 방문은 총 네번


당대 중국 최고의 학예인들과 교류한 박제가는 한 중 우정은 시를 타고

호저집이라고해서 박제가가 중국문인 172명과 교류한 시와 편지를 엮은 책이 있어요




2017년 12월 14일에 사드 보복 해결을 위해 방중한 문재인 대통령



그 나라에 어디를 가느냐는 그 속뜻이 있는 거예요

한중이 오랜 친구사이였음을 상기시키기 위함이었던 것


연경을 꿈꾸며 시를 썼던 어린 추사



박제가를 통해 추사를 알아본 중국학자 조강

그리고 추사 인생에 빠질수 없는 두 스승이


완원과의 만남은 운명적이었어요
이분이 원래 강남 양쯔강 이남지역에 있었는데 북경에 잠깐 일이 있어서 왔다가 만났어요

당시 고문헌을 수집하고 있던 완원이 원나라책인 산학계몽을 구하지 못하고 있던 중



고마움의 표시로 추사에게 많은 책을 선물한 완원
선대가 개척해놓은 것을 바탕으로 청나라의 많은 학예인들과 교류했던 추사

특히 완원을 선생으로 모셔야겠다 해서 완원의 완을 직접따서 완당이라고 했어요 




옹방강에겐 손자뻘이었던 24살의 추사
서로 대화가 통해야 가능한 사제의 교류

척하면 척 모든 질문에 막힘없었던 천재 추사


추사 아버지의 호인 유당을 직접 써서 선물한 옹방강
이별을 아쉬워하며 추사의 송별회를 연 중국 학자들



군관의 신분으로 간이 아닌 군모를 썼던 추사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중국 학자 8인이 쓴 시와 추사의 답가가 기록된 한중 우정작품, 추사전별도

연경에서 돌아온 이후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추사




일제강점기 때 경성제국대학 동양 철학과 교수로 재직함
한.중.일을 넘나들며 추사의 많은 작품을 수집해서 추사의 편지 값은 후지즈카가 다 올려놨다고




후지즈카 치카시의 동경대학교 박사학위 논문이  조선조에서 청조문화의 이입과 김완당
옛날에는 교수가 되고 박사학위논문을 내는 것이 많았어요

추사 김정희에 관한 후지즈카의 박사논문




물론 청나라 사람까지 포함해서!!
이분이 갖고 있는 자료를 제주 추사관, 과천 추사 박물관에 기증했다고해요


당시 외국여행은 희귀했던 경험으로 기존 유학파들이 외국 문화를 따라하기 급급했다면
추사는 습득하고 재창조, 토착화까지 성공시킴

금석학을 연구해 새로운 경지에 오른 청나라 학자들

진흥왕 순수비를 찾아나선 추사


진흥왕 순수비는 신라 진흥왕이 북한산 비봉에 세운 순수비죠.
조선의 도읍을 정할때 올라와서 무학대사비라고 했었잖아요

무학대사전설은 조선의 수도를 물색하고 있을때 잘못 찾아와 비석을 세웠다는 설


진흥왕 순수비임을 직접 확인함


추사에 의해 밝혀진 지금의 국보 3호 진흥왕 순수비

추사에 의해 발견된 또 다른 유물은


경주 암곡동 산속에 방치됐던 무장사 터


유쌤이 답사갔던 80년대에는 사람의 발길이 끓어졌던 곳이었다고


다행히 밭가는 아주머니가 있어 물어보니




시간을 잊고가라= 오래걸린다.
추사의 발에 걸린 비석 조각




추사 논문의 대표작이 두가지인데 진흥왕 순수비에 대한 고찰,
진흥왕 순수비와 황초령 순수비 또 하나는 실사구시설!

실사구시란 사실에 입각해 진리를 탐구한다.


이정도밖에 안되는 걸 후대에 알리는게 싫어서

추사 문집에 불태우지 않은 편지들이 많아요


만약 황초령비가 없었다면 우리는 진흥왕의 발자취를 몰랐을 것이다.

저 글씨는 그 당시의 글ㅆㅣ체잖아요

당시의 글씨체를 알수 있는 중요한 증거이기도함
역사도 밝히고 글씨체도 공부하고

그래서 중국에서 오자마자 실사구시를 실천한거군요


입고출신
옛것으로 들어가 새것으로 나오다

법도를 떠지 않으면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다.

법도를 떠나지 않는건 입고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건 출신



국제 학계에 뒤처지지 않고 교류한 추사


추사의 삶 속에서 많은 걸 배운 한 대목이 우리가 신문물을 받아들일 때
어떤 자세를 보여야하는가를 그가 보여준 것 


<출처: jtbc 차이나는 클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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