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그늘에서 벗어나 우리만의 야구 역사를 쓴건 광복 이후부터였습니다.
한국 야구의 역사를 바꾼 결정적 장면 1번째..
8.15 평화해방 1주년 기념 행사의 하나로 8월 16일 오후에 서울운동장에서 조미대항야구 경기가 화려하게 벌어졌습니다.
해방 1주년을 기념한 조미친선야구대회입니다.
1946년 3월 18일 조선 야구협회 즉 오늘날의 대한 야구협회가 만들어지면서,
해방직후 전국 각지에서 미군과의 친선경기를 가진 조선의 야구인들.
한국 야구인들과 미군의 입장이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미군의 지원을 받는 것이 야구 활성화에 도움이 되리라 본 야구인들.
연이은 전쟁으로 사기가 많이 떨어져 있던 미군. 야구 경기 같은 이벤트로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 올릴 수 있겠다 생각한 거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중단되지 않은 메이저리그.
그만큼 야구에 진심인 나라, 미국.
우리나라와 미국은 야구문화가 다른데,
1920년대부터 이어져 온 야구 문화가 미국 야구팬들은 경기 자체를 즐기는데, 우리나라는 자기편이 이겨야 즐거운?! 이길 것을 응원하죠.
그런데 사실 전력에서 우리나라는 미군을 절대 이길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한국과의 친선 경기를 앞둔 잉거프리센 소령의 특별한 약속은?
우리 미군을 상대로 점수를 내면 1점당 야구공 120개를 드리리다!
1946년 7월 기준으로 서울 중급 주택 가격이 1만 3천원.
한 마디로 집 두 채 값을 주겠다.
결과는 패배.
예상을 깨고 미군과 대접전을 벌인 끝에, 미국 4: 한국 3
야구공 30다스는 360개로 약 9만원입니다.
공 360개가 뒤바꾼 우리나라 야구의 역사.
최초의 학생 야구제전, 청룡기.
바로 야구공 30다스입니다.
그렇게 미군에게 받아낸 야구공이 씨앗이 되어 한국 야구의 꿈나무들이 자라날 수 있었습니다.
청룡기는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대회이고, 청룡기만의 특색이 있는데,
대회 3연속 우승 시 청룡기 영구 소장.
한국 야구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운명적 경기가 열립니다.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아시아야구연맹BFA이 주관하는 국제 야구 대회로 1954년에 창설하여 주로 아마추어 대표팀이 참가합니다.
야구 유망주들로 대회에 출전한 한국 대표팀.
그리고 결승에서 또다시 만난 일본.
한일전을 승리로 이끌며 아시아 야구를 제패한 한국 선수들.
이날의 승리는 한국 야구의 역사를 어떻게 바꿔 놓았을까?
특히 한일전 경기는 이를 악물고 뛰었던 당시 선수들.
야구로 일본을 이긴다는 건, 결코 쉽지 않다는 걸 알기에,
일본이 강한 걸 알면서도 한 발짝도 물러서기 싫었다고.
1945년 광복 이후부터 1962년까지 한국 야구는 일본 팀을 7전 7패로 단 한 번의 경기도 이기지 못했던 한국.
그때 당시 선수들이 가졌을 부담감은 상상 이상으로 남달랐을 것.
실제로 야구 전문가들 역시 오랜 야구 역사를 지닌 일본의 우승을 점쳤습니다.
그런데 일본을 두 차례나 꺾고 한국이 우승을 차지했던 것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첫 우승을 이끈 4번 타자는?
1회부터 선제 타점을 기록했고, 8회에는 홈런으로 2타점 추가.
한국과 일본 3:0 김응용의 대활약으로 승리. 야구 감독이 되기 전부터 4번 타자로 유명했었던 김응용.
선수 때부터 슈퍼스타 기질이..!
한국의 우승을 확정 지은 4번 타자 김응용 소속팀에 황소 한 마리를 보내주기로 약속합니다.
야구장에 조명탑이 세워지고 어떤 점이 바뀌었나?
야간 경기가 가능해지며 크게 개선된 운동 환경.
야간 경기 덕분에 평일에도 학생과 직장인의 야구 관람이 가능 해졌던 것.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 여파는 조명탑뿐만이 아닙니다.
야구의 인기와 함께 대다수 은행에서 야구단을 창단합니다.
한국 야구 최초로 정규 시즌 제도가 도입된 것.
그래서 정해진 월급 외에는 약간의 추가 수익이 전부였던 실업야구, 그래서 일반적으로 전화하는 편이 돈벌이에 유리했던 것.
민간 기업 최초로 실업 야구팀을 창단한 기업!
현재 마린스인 일본 프로팀 오리온스를 표방하여 창단된 실업 팀인 자이언츠.
1975년 창단된 자이언츠 실업 야구팀.
출처: 벌거벗은 한국사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