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는 클라스, 신병주, 조선의 탄핵군주, 핏빛 독재자인 연산, 연산군










조선역사 길라잡이인 신병주 교수는 주제를 폭군으로 잡음

성군의 장점을 본받아 지혜로 삼는 것도 좋지만 그만큼 폭군의 역사도 중요하다고함

반면교사 反面敎師
부정적인 측면에서 가르침을 얻는다.

잘못된 역사를 제대로 분석해서 우리 시대의 지표로 삼아야하지 않을까..

조선시대에도 조선 판 탄핵의 역사가 왕을 쫓아낸 역사가 있더라 그리고 또 우리 시대와 묘하게 대비되는 그런 장면도 많이 때문에 오늘의 강의 주제로 정했다고함


 일단 연산군의 기본정보부터 알아야죠.


이름은 이융
1476년 11월 23일 생으로 조선 10대 국왕임.

할머니가 그 유명한 인수대비




드라마 왕과나에서는 배우 전인화가 인수대비 역이었다고함
당시 폐비 윤씨 역할은 배우 구혜선이었다고 어우동 역의 배우 김사랑


최명길은 원경왕후 역

연산군의 취미를 살펴보면 음주가무, 여자, 사냥, 쇼핑, 군것질임

연산군은 쇼핑마니아임 조선시대에 쇼핑은 대체 어디서했을까요?

연산군은 해외직구족이에요. 요즘처럼 인터넷은 안되니까.


연산군의 이력에서 보면 적장자 출신이잖아요.

적장자는 중전의 장남을 말해요.

조선 역사중에 총 27명중 단 7명이 적장자였어요. 단종, 연산군, 인종 모두 적장자임

숙종도 적장자왕임

폭군 연산군을 낳은 역사적 배경이 연산군의 아버지는 누군가요?


조선의 기틀을 완성한 왕인 성종!

사림파와 훈구파 권력 균형을 이루게 했죠


성종, 조선 정치 문물의 기틀을 완성함
조선의 헌법이자 조선왕조의 근간이 된 경국대전, 단군조선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엮은 사서인 동국통감, 성종은 사후에 붙는 묘호에요.


또하나 경연을 가장 많이한 모범생인 성종
왕과 신하는 조선 왕조 학문 토론의 장인 경연은



엄청나게 많이했네용..ㅎㅎㅎ 세종이 더 많을줄 알았더니

경연왕은 곧 소통의 왕이죠. 아침에 조강 낮에 주강 저녁에 석강 밤에도 하기도 했다고

많이할대는 하루에 경연만 4번.. 지금 학생들도 하루 과외 4번이면 가출할거잖아요.

도망간 왕도 있는데 그게 바로 연산군이에요. 경연을 극혐함.
경연을 하면 신하들이 좋은 소리 별로 안해요.



불가하옵니다.  그럼에도 경연을 계속했던 성군인 성종을 보고 연산군에겐 더욱 부담이 됐겟죠.


연산군은 아버지의 좋은점을 본받기보다 사실은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있었어요.

완벽주의자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고함

성종의 적장자인 연산군은 세자를 위한 교육기관인 세자시강원에서 학물을 배웠는데


적장자 프리미엄이라고 귀한 아들은 좀 봐주는 경향이 있잖아요.

아들의 땡땡이를 눈감아준 성종
사실 연산군의 핑계도 가지가지 였다고함 추우면 추워서 못하고 더우면 더워서 못함

그러면 성종이 봐줘요.




연산군의 어머니는 폐비윤씨잖아요.

성종의 첫번째 왕비는 따로 있었어요. 첫번째 왕비는 한명회의 딸~
원래 왕위계승 서열 3위였던 성종은 장인인 한명회의 파워에 힘입어 왕으로 등극한것

그런데 왕비가 곧 죽게돼요...그래서 두번째 왕비인 계비를 찾기 시작하는데

조선왕조에서 계비를 뽑는 방법은 뭘까요?


원칙은 공채 방식의 간택이지만 외부 공고를 내고 모집해서 서류전형과 면접을 거쳐 간택
하지만 조선 전기까지는 왕의 후궁들 중에 내신성적이 좋은 후궁이 승진을 한다고해요.


당시 연산군을 임신중이었던 윤씨~ 무난히 중전의 자리를 차지했고

내부승진으로 후구으이 신분에서 왕비가 된 윤씨


9명까지 가능했다고해요. 후궁이 9명인 왕이 태종, 성종 등 이었는데 대부분 왕비와 사이가 안 좋은 편이었다고하네요.

폐비 윤씨가 쫓겨난 이유가 투기: 후궁과의 갈등때문이었다고해요.

성종보다 나이가 많았던 윤씨는 자신을 멀리하고 어린 후궁들만 찾는 성종에게 분노를 함

후궁들을 저주, 독살하려 했다는 의혹



그리고 또 하나의 변수가 비교적 여성의 지위가 높았던 조선 전기에는 재산 상속에서도 큰 차별이 없었던 때에요. 조선 전기 왕비 중에는 센 사람이 많아요.

대표적인 예가 태종의 왕비인 원경왕후

태종이 왕자의 난을 일으킬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또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 윤씨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킬 때 직접 세조에게 갑옷을 입혀 내보낸 정희왕후
그런 여걸의 당찬 이미지가 폐비윤씨에게 남아있지 않았을까..한다고

그리고 바로 성종이후에~ 여성의 지위가 달라지게되죠.




윤씨 폐위의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이기도 하다고해요.
가장 분개했던 인물이 인수대비인데


 폐위 3년뒤 사약을 받고 사망함 그런데 폐비 윤씨가 사약을 받고 죽는 이 시점에

민간에서 희생된 유명한 여인이 있어요.


간통 협의로 사형을 당한 어우동

솔직히 어우동의 죄가 사형감은 아니잖아요.

어우동 사형의 배경이 성리학적 기준이 강화되던 성종 시기에

요즘으로 치면 시범 케이스로 희생양이 된 어우동


폐비 윤씨가 죽을때 연산군의 나이는? 7살이었다고해요.

어린 나이 탓에 기억을 잘 못하다가 성종이 죽은 후 왕의 행적을 기록한 글에서
성종의 계비는 윤기견의 딸이다 라는걸 보고


그동안 정현왕후를 어머니로 알았던거에요.
즉위 후에야 알게된 폐비의 존재


식탐킹인 연산이 식사까지 마다한건 놀라운 일이라고
연산군 즉위 직후의 기록으로 불과 20살때임.

20살이 되어서야 친어머니의 죽음을 알게 된 연산군


연산군은 처음부터 폭군의 기질을 가졌던건 아니냐고?


연산군의 난폭함이 드러난 일화가 있는데 야사의 기록에 따르면

성종이 아끼던 사슴을 괴롭힌 연산군


즉위 후 사슴을 활로 쏴 죽였다고함 성군의 아들 중 문제아가 많아요.


연산군도 처음부터 폭군은 아니었다고해요.



이 사람들 전공이 " 아니되옵니다"

처음엔 알았다고하지만 그러나 서서히 본성이 드러나게 됩니다
독자의 전조로 경연에 불참하기 시작함



연산군이 가장 싫어했던 능상

능상은 왕을 능멸하다. 한마디로 기어오른다.

1498년 드디어 터진 사건 무오사화
무오년에 사림들이 화를 입은거죠.  선비 사士 재앙 화禍

선비의 숲인 사림

무오사화의 발생 배경이 성종이 죽고 실록을 편찬하기 위해 임시 기관인 실록청을 설치함
당시 실록청의 책임자였던 훈구파 대신인 이극돈

자신의 나쁜 짓이 기록됐을까 걱정되어 사관 김일손을 호출했다고해요.


훈구파와 대립하는 사림파의 핵심 인물이었던 김일손


고민 끝에 유자광을 찾아간 이극돈은


유자광이 찾아낸 한 기록을 보니 사림파의 수장 김종직의 글을 찾게됩니다.


조의제문
항우에게 살해당한 의제를 애도하다.

세조의 왕위 찬탈을 풍자해 쓴 김종직의 글이에요. 조의제문을 보고 분노한 연산군


때마침 대간직을 주로 맡고 있던 사림파
안그래도 군기 잡으려고 했는데 무오사화로 사림파를 대거 숙청함

연산군의 광기가 최초로 드러난 사건이에요.

부관참시라고 관을 열어 시신을 참수하고 이때 김종직은 이미 사망한 상태잖아요.
김종직의 관을 쪼개 시신을 참수하기까지 주희생양은 사림파 젊은 사관과 언관들이었어요


뒤이어 연산군이 일으킨 광기의 복수극


갑자사화
윤씨를 폐비시키는 일에 가담한 일문 모두를 숙청한 사화죠.

성종이 아낀 두 후궁을 잡아들여 얼굴을 가리고 친아들에게 매질을 시킴
결국 두 후궁은 처형을 당하죠



조선의 춤신춤왕인 연산군은 칼을 든 채로 처용무를 추다가 인수대비를 위협하기도 했다고해요. 그래서 인수대비의 죽음을 앞당겼다는 이야기도..있음

갑자사화의 희생자 수는? 연좌제로 약 200여명이 희생당함

무오사화 당시 귀양갔던 사람들도 이때 대부분 처형당했다고하네요.


연산군의 광기와 폭정에 착 밀찰한 간신
둘째 아들 임숭재도 대단한 간신이라고함.  임사홍과 임숭재는 연산군의 기생 공급책으로 활약했는데 장남 임희재는 반대로 연산군을 강하게 비판하다가 결국 처형당했다고해요.

간신 임숭재가 남긴 마지막 유언이


피적삼에 분노한 연산군이 갑작스레 갑자사화를 일으키는데..

박종화 작가의 소설 금삼의 피에 나온 장면에서 재미를 위해 드라마와 소설에서 허구가 섞인 내용이라고해요.

임사홍이란 인물이 완전히 폐비 윤씨의 죽음을 알리고 연산군의 분노를 자극해서
드라마에서는 갑자사화의 주역으로 그려졌는데 갑자사화의 주역은 연산군이에요.

능상에 대한 연산군의 오랜 불만이




효심 때문이라게 엔 좀... 그렇다고

연산군일기의 기록을 보면 어머니의 기일에 음행을 했다


목표는 왕권의 강화!!


연산군 독재 정치의 절정은 갑자사화임
민가를 다 헐어서 사냥터로 만들고 기생을 불러서 매일 파티하고


채홍사를 보내 전국의 미녀를 색출 이렇게 뽑은 기생을 부르는 용어는



흥청때문에 나라가 망하겠다 라고해서 탄생한 말이 흥청망청이라고해요.

연산군의 여인인 장녹수가 등장합니다.



폭군 연산을 사로잡은 스킬이 대단한거 같다고



장녹수 치마를 밟았다고 참형을 하기도함


조선판 국정농단의 주인공인 장녹수
모든 권력이 장녹수의 손아귀에서 나왔다..



창덕궁 후원에 서총대라는 대규모 연회장을 건설함

한강 물길을 트라는 지시를 하기도하고 역대 지도자중 토목 사업으로 성송한 지도자가 없다고


중국에 가는 사신들에게 사탕좀 사오라고~ 아니면 흰고래 수염~

다래도 서리맞은 다래나~


가채는 제일 긴걸로~ 연산군이 진짜 최악인 것은 사냥터 확보를 위해 민가에 금표를 설치


궁궐 주변의 민가 강제 철거하고 출입시 극형에 처했다고해요.

연산군 시대에 활동한 유명한 도적은? 홍길동이라고해요~~

연산군 시기에 실존 인물로 광해군 시대에 허균이 홍길동전을 집필함. 실존 인물 홍길동이 모티브가 된거라고하네요


백성들에겐 사이다 같은 존재죠.


조선 시대 내시의 대표 김처선~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까지 무려 7명의 왕을 모신 김처선



목숨을 건 직언을 함



김처선을 죽였을까? 간언을 받아들였을까?

활로 직접 쏘고 팔다리는 물론 혀까지 잘랐다고해요..ㅠㅠ 엄청 잔인하게 죽임
거기에 김처선 부모의 무덤까지 철거함

연산군의 뒤끝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음


처가 들어가는 건 다 바꾸라고 그래서 처용무가 풍두무로 이름을 변경함

춸권을 휘드르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지만  그러나 한편으로는 공포 정치가 무너질까 두려워한 연산군


최측근인 환관과 궁년들에게 패를 장착


신언패는 말을 삼가는 패로  입 함부로 놀리면 죽는다.

신하들의 사모에는 충성을 새김 무조건 충성할 것을 강조함

악행계 창의성 1인자인 연산군


입을 다물고 혀를 깊이 감추면 어딜가더라도 몸이 편안하리라.

연산군의 독재템2 허한패


허한패를 받아야 휴식이 가능해요. 연산군의 조선은 패의 왕국이에요.



연산군에게 절약을 권했다는 이유로 부관참시당함

시를 한수 지으라 했는데 두수 지어서 참수당함

상을 당하면 육식을 삼가는 풍습이 있는데 성종 사후 3년간 고기반찬을 안 먹은 한 신하
저건 거짓 충성이라며 처형함

광기와 폭정의 시기인 연산군 시대에는 항상 초긴장 상태로 지내야하잖아요.

행여 연산군의 눈에 거슬릴까 늘 살엄음판 같았던 궁궐


천장이라해서 손바닥 뚫기, 촌참, 손마디 자르기..ㅠㅠ
낙신 , 인두로 지지기. 처형후에는 쇄골표풍까지~~
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기~


조선 왕조 최악의 공포정치임


기록에 의하면 궁에서 다양한 동물을 키운 연산군은 동물 사랑이 각별했다는 소문이 있는데 과연 진실은?

좋아하는건 맞는데 목적이 사냥이었다고함.

호랑이나 멧돼지같은 동물들을 가둔채로 사냥했다고










배우 이종석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한다고.
저런 기록이 있는건 사실인데 인수대비 집안이 조선대표 미남미녀 가문이었다고해요.

인수대비 아버지 한확은 당대 최고의 꽃미남이었다고함 한확의 누이들은 명나라 황제의 후궁이 되기도 했다고함

부전여전 당연히 미인으로 추측되는 인수대비 연산군도 미남의 대를 잇지 않았을까?

모든것엔 끝이 있는 법이죠.


즉위 말엔 불안 증세가 심해진 연산군.

황새가 자신을 죽이러오는 꿈을 꾸고선


폐위 10일 전에 연 연회에서는 시를 읋으며 눈물을 흘린 연산군


저 여인은 장녹수와 전비라고해요.

비극적인 앞날을 예감했는지 함께 통곡한 세 사람

그 예감대로 10일뒤 중종반정이 발생


중종반정은 조선 최고의 반정이에요. 조선판 탄핵사건

조선에는 연산군과 광해군 두번 이렇게

한국 현대사를 포함하면 총 세번 연산군이 처형시키고 유배시키니까 관리들도 자기 살길을 찾는거예요. 계속 당할 바에야 반란을 일으키자

반정을 계획한 팀도 여럿임 그중 중종 반정에 성공한 팀이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팀임



역사도 타이밍이죠.

반정이란? 바른것을 되돌리다. 성리학적인 가치를 포함한 것이에요.

신하들이 힘으로 권력을 뒤집어도 성리학의 나라인 조선은 정당성에 따라 다음 왕을 추대함

중국이나 일본은 반정의 역사가 없어요. 쿠데타 우두머리가 곧 왕이 됨

권력을 뺏은 사람이 새왕조를 여는 거에요.


그대신 적합한 왕위 계승자를 옹립하는 것. 이것이 조선의 반정이에요.

반정의 경험은 의미가 잇어요.

그 서슬 퍼런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역사적 경험 이는 훗날 인조반정으로 이어지고

더 멀리 바른 것으로 되돌린 최근의 또 다른 경험

이 모두를 이끈 선구적인 역사적 경험이 아닌가..
반정세력 군이 많지 않았는데도 연산군 정권이 워낙 허술했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엔 쉽게 뚫려버려요.

반정성공후


한때 연산군의 새어머니인 정현황후 윤씨의 아들인


진성대군이 중종이에요.

진성대군의 집으로 향한 반정세력을 보고 당황한 진성대군


그런데 이때도 부인이 똑똑해요!!
훗날 단경왕후 신씨, " 침착하세요 말머리가 집 쪽을 향한다면 공격하러 온 것이지만
말머리가 궁 쪽을 향한다면 모시러 온 것이다."



그러나 단경왕후 신씨는 읩궐 7일만에 폐위됩니다. 단경왕후의 아버지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이기 때문에..

요즘으로 하면 적폐 세력의 딸이기에


중종반정 후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도로 유배를 됨




위리안치라해서 죄인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가시 울타리 안에 가두는 형벌이라고해요
두달만에 역질로 사망한 연산군

연산군 죽음에 대한 의혹? 어릴때부터 병치레가 잦았던 연산군은 워낙 사치와 향락에 젖어 살다가
좁고 열악한 환경에 갇힌 스트레스로 사망하지 않았을가 한다고.

즉위 12년 만에 서른 한 살에 생을 마감한 연산군

장녹수는 거리에서 백성들에게 뭇매를 맞고 비참한 최후를 맞음
폐위도어 사가로 폐출된 신씨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연산군의 사람이죠.

임종 직전 연산군이 남긴 유언이


 폐비 신씨는 중종에게 연산군과 함게 묻어줄 것을 간청해
남편의 묘를 돌보며 장수하다가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지독한 폭정을 일삼았으나 결국 쓸쓸한 최후를 맞이한 연산군


백성들이 연산군을 비난한 노래인데

사모란? 사기와 모의~
충성이란 사기와 모의다 왕이 거동한 곳은 교동도일세


두에라 예 또한 각 시의 집이니~
이게 이시의 하이라이트에요.
가시나무의 울타리에 갇혔잖아요.


연산군의 폐위가 갖는 역사적 의미는 연산군 나비효과에요.

연산군 시대에 했던 독재 정치라던가 여러 파형적인 정치 형태의 모습들을
모두 극복해나가려는 노력~ 후대 왕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철인정치는 왕은 진리와 선을 아는 철인이 되어 백성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
중종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됨

후대에 반성과 성찰의 계기가 된 연산군의 시대

역사강의 넘나 재밌어용..ㅎㅎㅎ 학교 수업도 이렇게 하면 정말 너무 재미있을텐데욤.

다음 강의는 조선 폭군 2부작 광해군에 대한거라고해요~ㅎㅎㅎ 요것도 꼭 챙겨서 봐야겠어용


<출처: jtbc 차이나는 클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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